왜 같은 악보를 두고 다른 연주가 나올까?
- Hyukjun Sohn
- 2023년 9월 19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20일
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질 만한 궁금증이다. 요리에 비유해보자면, 같은 레시피를 두고 두 사람이 요리한다 치면 맛이 거의 동일할텐데, 어떻게 음악의 경우에는 같은 악보를 두고 너무나도 다른 연주를 듣게 되는걸까? 작곡가가 하라고 한 대로 하는 것이 좋은 연주가 아닌건가?

이 질문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작곡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부터 알고 넘어가야한다.
작곡가는 쉽게 말해 곡을 쓴 사람이다. (이 글에서는 인간 작곡가의 경우만 다루도록 하겠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을 더 자세히 표현해본다면? 자신의 음향상상력을 사용해 자신의 생각, 때로는 철학을 소리의 형태로 표현해 세상에 없던 소리의 조합을 상상해낸 사람이다. 많은 작곡가들은 그 상상해낸 소리를 악보에 옮겨적는다. 그 이유는 바로 소리의 유한성에 있다. 소리는 필연적으로 소멸하는 것이 과학적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기억과 목숨에는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기에 작곡가의 머릿속에 있던 소리는 변하거나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과거 구전을 통해 전해진 선율은 현재 남아있는 기록이 없기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음악 기보법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보법의 발전은 음악 역사상 꾸준히 이루어져와 현대에는 미분음과 다양한 주법들 등과 같은 복잡한 것들을 악보에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서두에 언급한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 정도로 정교해진 기보법이 있다면, 즉 작곡가가 자신이 생각한 소리를 가장 작은 단위까지도 상세하게 적어낼 수 있게 되었다면, 그 곡은 누군가에 의해 연주되든 관계 없이 똑같이 연주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어째서 같은 악보를 두고 다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것인가?
이 질문의 정답은 여러 측면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1. 모든 사람은 태초에 다 다르기 때문 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음악환경에서 자라왔다. 가령 한국의 국악만 듣고 자란 사람이 있다면, 스크리아빈의 음악 언어를 구사하긴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 사람이 연주하는 스크리아빈 연주와 스크리아빈 음악을 많이 듣고 자란 사람의 스크리아빈 연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일 것이 당연하다.
사람의 성격도 모두 다르다. 우리는 다른 부모 아래에서, 다른 스승들 아래에서, 다른 친구들과 지내오며 모두 다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다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급하고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여유로우며, 누군가는 즉흥적일테고, 또 누군가는 계획적일 것이다. 어떤 이는 타인보다는 본인을 더 신뢰할 것이고 어떤 이에겐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이러한 성격들이 음악에 묻어나온다.
이외, 가정환경, 사회환경, 나이, 성별, 인생가치관, (음악적) 취향, 개인의 강점 및 약점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연주도 마치 우리 얼굴처럼 정말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매번 다른 연주를 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매일매일, 어쩌면 매분매초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같은 사람의 연주라 할 지라도 연주 시점의 기분이나 몸상태에 따라 다른 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마라톤을 뛰고 나서 바로 하는 연주와 최상의 컨디션에서 하는 연주는 다를 것이며, 기분 좋은 날과 기분 나쁜 날에 하는 연주도 다를 것이다.
외부적 요인도 있다. 산만한 시장통에서 하는 연주와 조용한 도서관에서 하는 연주, 울림이 좋은 성당에서 하는 연주와 울림이 좋지 못한 방음된 공간에서 하는 연주 (이 경우 연주자는 의식적으로 연주를 달리 해야 한다. 참고), 청중이 있는 연주와 없는 연주 등 상황에 따라 연주자의 집중력이라든지, 공간의 음향과 같은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항상 다른 연주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작곡가는 악보에 모든 것을 담지 않는다.
더욱 음악적으로 접근해보자면, 사실 앞전에 얘기했던 기보법의 발전과 연관이 있는 내용인데, 아무리 기보법이 발전한다 한들, 여전히 작곡가가 악보에 담지 않는/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 이유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음악은 소리를 다루는 예술이기에, 연주하는 장소에 따라 다르게 연주되어야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오히려 수학적인 접근의 정확하고 오차 없이 보이는 기보법(예: 도 음을 3.56초 지속 후 55dB에서 45dB로 감소, 속도는 ♩=140)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잔향이 길게 남는 교회에서 너무 빠르게 연주한다면, 소리들이 서로 겹치며 뭉게져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런 연주는 답답한 방음방에선 효과적일지 몰라도, 교회에선 이것은 현명한 전략이 아니다.
둘째로 어떤 것들은 당시 관습상 악보에 적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바로크 시대의 장식음과 카덴자는 즉흥으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았다. 연주자가 곡의 분위기를 나름대로 해석해 본인이 생각하는 적절한 장식음을 배치, 카덴자를 연주하는 식이었다. 이는 시대를 거쳐 변해왔기 때문에 (이에는 바흐의 영향이 컸다) 바흐 이후의 음악에서는 악보에 표기된 꾸밈음만 연주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20/21세기에 태어난 우리, 현대음악까지 이미 접해 악보에 적혀있는 음만 연주하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는 (바로크 시대의 전통과 규칙이 친숙하지 않다면) 꾸밈음 없이 기본 윤곽일 뿐인 단순한 선율만 연주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셋째로는 작곡가도 표기의 한계가 있다.
아무리 악보에 자신의 요구사항을 상세하게 적는 작곡가라 해도, 소리를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단어는 어디까지나 스펙트럼의 방향을 나타내지, 위치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곡가는 필연적으로 연주자를 믿고 그에게 결정권을 위임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연주자의 ‚해석’이 첨가되며 음악은 다양해지는 것이다.
즉, 악보라는 것은 완벽한 것이 아니며, 작곡가는 연주자가 지켜야할 최소한의 사항을 적어놓은 것이며, 그 이후의 음악을 세상으로 불러오는 것은 전적으로 연주자의 몫이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하자면, 작곡가의 머리에 있던 음악이 악보라는 기호들의 집합에 국한되어 있다가 연주자에 의해서 그 기호들이 음악으로 다시 펼쳐지는 과정에서 연주자의 상상력, 지식수준, 감정 등의 요소, 사소하게는 신체적 상태, 연주되는 장소 따위의 것들의 복합적인 작용이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항상 다른 결과물이 출력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예술의 아름다움은 다양성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100%의 확신을 가지며 말할 수 있다. 모든 연주는 그때그때 달랐고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다행인 사실이다. 음악의 다양성은 음악의 발전의 필수조건이다. 우리는 타인의 다른 점에서 가장 많이 배우기 때문이다. 모든 연주가 같다면 변화도, 발전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듣는 즐거움도 없을 것이다. 물론, 남들과 다르게 연주하는 것이 목적이 되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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